어떤 사람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만나 예기치 않게 옆길로 빠진다. 자식의 죽음, 암 투병, 약물 중독과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힘겨운 싸움 같은, 인생을 바꾸어 놓는 비극이 이들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이 사람들은 더는 산 위에 있지 않다. 이들은 당혹스러움과 고통스러움의 계곡에서 헤맨다. 이런 일은 어떤 나이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 여덟 살에도, 여든다섯 살에도, 또는 그보다 더 많은 나이에도 일어날 수 있다. 첫 번째 산에서 굴러 떨어지는 일은 어떤 연령대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계곡에 떨어진 사람들이 경험하는 고통의 시기는 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드러내며, 자신이 생각하던 모습이 사실은 진정한 자기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이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도 알지 못했던 내면이 노출되고 만다. 자기가 겉으로 내걸고 다니던 여러 모습들이 실제 자신이 아님을 비로소 알아차린다. 또 다른 층이 엄연한 자기로 존재함을, 지금까지 무시해 왔던 어떤 모습, 어둠이 똬리를 틀고 있으며 가장 강력한 열망들이 살아 숨쉬는 어떤 기질이 실제 자기 모습으로 존재함을 그제야 깨닫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고통에 맞닥뜨리면 움츠러든다. 이들은 평균 이상으로 더 두려워하고 분개하는 듯이 보인다. 이들은 집에 걸려 자신의 깊은 내면을 외면한다. 그리하여 인생이 갈수북터 쪼그라들고 더 외로워진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계곡이 자기 발견과 성장의 계기가 된다. 고통의 시절은 일상이 피상적으로만 흘러가는 것을 방해해서, 자신의 좀 더 깊은 내면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자기 기질 깊숙한 곳에 보살핌의 본질적인 어떤 능력, 즉 자아를 초월해서 타인을 보살피고자 하는 어떤 열망이 있음을 깨닫는다.
이 열망에 맞닥뜨릴 때 이 사람들은 전인적인 인간 whole person이 될 준비가 완료된 상태이다. 이들은 익숙한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마침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것도 단지 구호로서가 아니라 현실 속 실천으로. 사람들의 인생은 가장 큰 역경의 순간에 자기가 대응한 방식에 따라 제각기 다르게 규정된다.
고통을 통해서 한층 더 성장한 사람들은 두 가지 작은 반란 단계로 나아간다. 첫 번째로, 이들은 자기의 이상적 자아(한 개인이 자신이 되고자 하는, 무의식적으로 만든 완전성을 갖춘 자아-옮긴이)에 반기를 든다. 이 사람들이 첫 번째 산에 있을 때 이들의 자아는 자기가 얻으려고 애쓰는 무엇, 즉 명성이나 즐거움이나 성공을 기대하는 어떤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계곡에 떨어지고 나서는 이상적 자아에 흥미를 잃는다. 물론 나중에 이들은 여전히 이기적인 욕구를 느끼기도 하고 또 거기에 굴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자아의 욕구들은 자신이 자기 안에서 발견한 깊은 영역들을 결코 만족 시키지 못할 것임을 이들은 깨닫는다
두 번째로, 이들은 주류 문화에 반기를 든다. 평생 동안 경제학 강의를 들어왔거나 또는 인간은 이기적인 관심사(돈, 권력, 명성)를 추구한다고 가르치는 문화권에서 살아온 이 사람들이 갑자기, 남들이 자기에게 당연히 바라야 한다고 말하는 모든 것에 흥미를 잃어버린다.
이들은 자기 욕구의 수준을 한층 높인다.
이들이 그러도록 등을 떠미는 것은 어떤 도덕적인 대의이다. 세상은 이들에게 독립 independence을 원하라고 말하지만, 이들은 상호 의존 interdependence을, 따뜻한 인간관계의 망 안에 녹아들기를 원한다. 세상은 이들에게 개인적인 자유를 원하라고 말하지만, 이들은 친밀함과 책임과 헌신을 원한다. 세상은 이들에게 사다리를 타고 높이 올라가 성공을 추구하길 원하지만,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이들은 개인적인 차원의 행복보다 훨씬 더 큰 어떤 것으로 시선을 돌린다.
고통을 통해 한층 더 성장한 사람들은 용감해져서, 자기의 예전 자아의 어떤 부분들이 소멸해 버리도록 방치한다. 계곡에 떨어진 뒤로 그들의 동기 부여는 자기중심적인 것에서 타인중심적인 것으로 바뀐다.
자신이 지금 첫 번째 산을 오르고 있는지 아니면 두 번째 산을 오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결정적인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당신이 궁극적으로 소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 내면에 있는 자아인가, 아니면 당신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인가?
첫 번째 산이 자아ego를 세우고 자기self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자아를 버리고 자기를 내려놓는 것이다. 첫 번째 산이 무언가를 획득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무언가를 남에게 주는 것이다. 첫 번째 산이 계층 상승의 엘리트적인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무언가 부족한 사람들 사이에 자기 자신을 단단히 뿌리내리고 그들과 손잡고 나란히 걷는 평등주의적인 것이다.
두 번째 산을 오르는 방식은 첫 번째 산을 오르는 방식과 전혀 다르다. 첫 번째 산은 정복한다. ‘나'가 이 산을 정복하는 것이다
두 번째 산은 다르다. 두 번째 산이 '나'를 정복한다. 나는 어떤 소명에 굴복한다. 그리고 그 소명에 응답해, 내 앞에 놓여 있는 어떤 부당함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다한다. 첫 번 째 산에서는 야심을 품고 전략적으로 접근하며 독립심을 발휘하지만, 두 번째 산에서는 인간관계를 중시하고 친밀하며 무엇에도 굴하 지 않는 태도로 일관한다
두 번째 산에 있는 사람들은 다음 네 가지 가운데 하 나 또는 전부를 위해 단호하게 헌신의 결단을 내리고 또 실천한다.
직업(저자는 '소명' '천직'으로서 '직업vocation‘과 생계나 출세를 위한 일자 리job 또는 커리어 career'를 구별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직업은 '소명으로서 직업'을 가리킨다-옮긴이)
배우자와 가족
철학과 신앙
공동체
* 어떤 직업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그 일을 하며 평생을 살아가는 것
* 결혼 상대를 결정하고 결혼 생활을 잘 꾸려 가는 것
* 인생철학을 세우고 다듬어서 신앙을 경험하는 것
* 공동체에 기여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히는 것
*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쳐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번성을 누리도록 노력하는 것
우리 삶의 충족감은 우리가 이런 것들을 얼마나 잘 선택하는지 그리고 때로는 상충되기도 하는 헌신들을 얼마나 잘 수행하며 살아가는 지에 달려 있다.
나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 구조와 도덕적 구조가 건전하며 우리는 그저 개인적으로 자신의 부족한 점을 고쳐 나가기만 하면 된다는 믿음도 더는 가지고 있지 않다. 자기 자신에 대한 강조(개인적인 성공, 자기 충족, 개인적인 자유, 자아실현)는 재앙일 뿐이다. 좋은 인생을 살아가려면 훨씬 더 큰 차원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 이것이 지금 나 의 생각이다. 자기의 약점을 개선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문화적 패러다임 전체의 무게 중심이 첫 번째 산의 초개인주의에서 두 번째 산의 관계적 사고방식으로 이동해야 한다.
기술을 우선시하는 풍조라든가•••·•• 그런데 확실한 점은 이런 발상들이 50년 동안 확산된 결과, 끈끈한 유대감이 살아 있는 공동체적인 삶을 살아가기가 한층 더 어려워졌다는 사실이다.
자기라는 개인과 사회 사이에는 언제나 긴장 관계가 존재한다. 모든 것을 너무 빡빡하게 옳아매면 거기에 반발하려는 충동은 그만큼 더 커진다. 그러나 우리는 정반대 문제를 안고 있다. “나는 자유다"라는 문화 속에서 개인들은 외로우며 서로에게서 느끼는 애착은 느슨하다. 공동체는 해체되고 개인들 사이의 결속은 끊어지며 외로움은 확산된다. 이 상황은 좋은 삶을 살아가는 것, 즉 사랑과 연결을 바라는 깊은 인간적 갈망을 채우는 것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든다. 모든 연령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지만 특히 청년들은 더 그렇다. 이들은 구조화되어 있지 않고 불확실하기만 한 세상에 던져진다. 믿고 의지할 권위나 방호책도 거의 없다. 그런 것들은 오로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자기 인생 여정에 올려놓는 일 자체가 놀라울 정도로 어렵다.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이 학생들이 실제로 묻고 있는 질문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내가 진정으로 분명하게 확인하고 싶은 것은 '나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이지 내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나에게' 진실인 어떤 진실을 찾는 문제, 즉 '내가 인생을 바쳐서 기꺼이 살고 또 죽을 수 있는 어떤 사상'을 찾는 문제이다 ·•··· 아 프리카의 사막이 물을 애타게 그리듯이 내 영혼이 목말라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충분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 국면을 동시에 통과하고 있을 때 당신은 모든 것이 유동적인 어떤 사회의 일원이 된다. 폴란드의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Zygmunt Bauman이 “액체 근대성 iquid modlemiy"이라고 부른 것에 맞닥뜨리는 것이다(바우만은 가족이나 직장 같은 사회 제도를 포함해 모든 것이 견고하고 고정되고 확정적이던 "고체 근대성"의 시대를 지나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불확실해진 "액체 근대성"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주장한다-옮긴이). 스마트폰 시대에는 어떤 거래나 인간관계를 맺거나 깨는데 들어가는 비용인 마찰 비용이 0에 가까워진다. 인터넷은 당신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클릭해서 시험적으로 사용해 보라고 권한다. 온라인에서 산다는 것은 흔히 전환 상태에서 사는 것을 뜻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실질적으로 어떤 것에도 깊이 몰입하지 못한다. 온라인 인생은 헌신의 결단과 몰두를 가로막는 온갖 장치들과 기기들로 가득 차 있다. 만일 당신이 30초 동안만이라도 주의를 집중할 수 없다면, 당신은 과연 어떻게 인생을 위해 무언가를 수행하고 헌신할 수 있겠는가?
이 사람들은 당신이 스스로를 직장이 바라는 기민한 동물로 만들어 나갈 때마다 지지와 인정의 금메달을 당신 목에 걸어 준다.
능력주의 meritocracy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가장 자신만만한 도덕 체계이다. 이것이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고 또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 버렸는지,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비경제적인 대상조차 경제 관련용어로 가리키거나 설명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사람들이 쓰는 단어들은 자기가 의미하는 내용을 바꾸어 나간다.
'인격 character'은 이제 더는 사랑, 봉사, 보살핌 등과 관련된 어떤 도덕적 자질이 아니라 끈기, 생산성, 자기 규율 등과 관련된 일련의 업무 특성이다. 능력주의는 '공동체 community?를 재능 있는 여러
개인들이 서로 경쟁하는 집단으로 규정한다. 능력주의는 사회를 끝없이 배열되는 동심원들의 조합으로 만든다. 이 조합에서 다보스포럼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가장 가운데 동심원을 구성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의 성취 업적에 따라서 제각기 다른 동심원들에 소속된다. 능력주의는 더 똑똑하고 더 많은 성취를 거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가치 있다는 메시지를 그러지 않는 척하면서 열심히 사회에 확산한다.
영혼을 무감각하게 만들어 버리는 능력주의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당신이 자기 내면에 이 능력주의와 경쟁하는 도덕 체계를 나란히 두는 한, 당신은 그럭저럭 버티며 살아남는다. 그러나 만일 능력주의에 맞설 경쟁력 있는 가치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능력주의는 당신을 한입에 삼켜 버린다.
욕구는 사람을 단단히 밀착하게 만든다. 욕구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일자리나 도시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그 사람을 밀어붙인다. 그러나 욕구가 부족하면 이 사람은 무심해진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정서적인 회피 즉 냉담함을 일상적으로 달고 다니는 태도에 젖어들게 된다. 요컨대 능력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는 사랑하지만 정작 본인은 사랑하지 않는 삶에 빠지도록 조장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어떤 것에 온전히 집중하고 몰두한다는 느낌을 가지기가 어렵다.
자신과 동료들은 세상을 개선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저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기 위해 글을 썼을 뿐이었다. 톨스토이는 인생에 신물을 느꼈으며, 인생에서 그 어떤 의미 있는 것도 찾지 못했다.
그는 인생의 계곡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공통은 다양한 형태를 띠고서 찾아온다. 어떤 사람은 일에 치여 사느라 자기 인생의 실마리를 잃어버렸음을 깨닫는다. 어떤 사람은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경험한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밝은 미래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고 느낀다. 어떤 사람은 심장마비, 암, 뇌졸중 등으로 쓰러진다. 어떤 사람은 겉으로 드러난 성과를 토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쌓아 올렸지만 실패나 스캔들을 겪고는 이 정체성이 사라져 버렸다고 느낀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감정이 드라마틱하게 닥치는 위기가 아니라 서서히 진행되는 위기로 다가온다. 자기 일에 대한 열정이 점점 사라 진다. 융 학파에 속하는 정신분석가인 제임스 홀리스가 상담했던 어떤 환자는 이 위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무슨 게임을 하든 간에 기를 쓰고 이기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그런 게임들에 얼마나 많이 휘둘렸는지 모릅니다.“
톨스토이의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치를 측정할 수도 없고 즐길 수도 없는" 상태에 떨어지고 만다.
내 커리어는 이미 가망 없이 실패해 버렸고 자기 신분을 무너져 내렸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내가 다음번에 가야만 하는 곳이 어디인지 나는 몰랐다."
사람들은 보통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가 안고 있는 문제가 얼마나 포괄적인지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우선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 무언가 잘못된 게 있음을 부정한다. 그런 다음 낡은 실패의 계획을 따라가려는 노력을 강화한다. 그러고 나서는 어떤 새로운 흥분거리(예를 들면 연애를 하거나 술을 더 많이 마시거나 마약에 손을 대거나 하는 것)에 자신을 내맡긴다. 그러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가고 나서야 비로소 인생에 대한 자기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음을 인정한다.
이것은 일종의 텔로스telos(목적) 위기이다. 텔로스 위기에 빠진 사람은 자기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쉽게 부서질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철학자 니체는 인생을 살아갈 ‘이유 why'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과정 how’이든 견딜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 목적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여정에서 만나는 온갖 고난을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기 목적을 모르는 사람은 아주 작은 고난에도 쓰러져 버린다
스탠퍼드대 학교 교육학 교수 윌리엄 데이먼 wiliam Damon은 《무엇을 위해 살 것 인가 The Path to Purpose》라는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젊은이들 가운 데 오로지 20퍼센트만이 인생의 목적을 온전하게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요즘 많은 사람들에게 당파성은 어떤 정당이 더 좋은 정책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과 저주받아야 할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다. 인종, 지역, 종교, 집단, 가족 같은 다른 애착 요소들이 시들어 버리고 없을 때 사람들은 흔히 당파성으로 자기의 공허함을 채운다.
이것은 정치가 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정치에 요구한다. 정치가 인종적 도덕적 정체성이 되고 나면 타협이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타협은 불명예가 되기 때문이다. 일단 정치가 어떤 사람의 정체성이 되고 나면 모든 선거는 생존 투쟁이 되며, 이 생존 투쟁에 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부족주의는 애착 관계에서 분리된 개인을 괴물로 만들어 버린다.
고통에는 본질적으로 우아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때로 슬픔은 그저 슬픔일 뿐, 온전하게 겪어야만 한다. 인생에서는 나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이런 것들이 고귀한 무언가를 단련시키기 위해 일어나 는게 분명하다고 말함으로써 그 순간들을 감상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다.
고통은 어떤 대응을 부른다. 그 누구도 고통을 피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모두 고통에 대응하는 방식을 자기 나름대로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흥미로운 사실인데,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으로 고통에 대응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자기 아이가 먼저 저세상으로 갔기 때 문에 파티장에 가서 즐거운 기분을 마음껏 누려야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아이를 잃었으므로 아이를 잃은 다른 사람을 충분히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사람들은 얕은 접시에 놓인 적은 음식은 깊은 허기를, 고통이 드러 내는 깊은 공허함을 채워 주지 못할 것임을 깨닫는다. 오로지 정신적인 음식만이 그걸 채워 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할 때 이에 대한 대응으로 관대함을 실천한다.
시인 테드 휴스는 경험하기에 최악인 것이 흔히 기억하기에는 가장 좋다고 있다. 왜냐하면 보호막이 몽땅 벗겨진 그 고통의 순간들에서 겸손이 획득되고, 어떤 문제가 선명하게 드러나며, 또 어떤 봉사의 소명이 분명하게 접수되기 때문이다.
고통의 시기에 대한 통상적인 반응은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 상황에서 나타나는 증상들을 치료한다든가 술을 마신다든가 슬픈 음악을 듣는다든가 하는 시도 말이다.
고통의 순간에 놓여 있을 때 해야 할 올바른 일은 고통 속에 똑바로 서는 것이다.
자기 인생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질문을 한다는 뜻이다.
- 내가 지금까지 잘한 일은 무엇일까? 내가 지금까지 못한 일은 무엇일까? 보수나 대가가 없을 때는 어떻게 할까?
심리학자 제임스 홀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신의 자아는 불확실성보다는 확실성을, 예측 불가능성의 놀라움보다는 예측 가능성의 안정성을, 모호함보다는 명료함을 선호한다. 당신의 자아는 들릴락 말락 하는 마음의 웅얼거림을 언제나 덮어 버리고 싶어 한다."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던 어떤 꽃의 향기, 우리가 듣지 못했던 어떤 곡조의 울림, 우리가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던 어떤 나라의 소식'을 감지하는 무언가가 당신의 내면에 존재한다.
우리는 지금 포기의 첫 단계, 새로운 자아가 떠오를 수 있도록 낡은 자아를 버리는 단계에 있다. 당신이 자기의 이상적 자아보다 훨씬 더 나은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 바로 이때이다. 당신이 심장과 영혼을 진정으로 발견하는 것이 바로 이때이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 힘쓰라고 말하지만, 두 번째 산에 있는 사람은 인생의 의미와 도덕적 기쁨을 추구하는 데 힘을 더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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